'있잖아. 내 가슴에는 칼이 꽂혀있대'
누가 그래?
'옛날 남자친구'
큰 칼이래?
'글쎄? 아무튼 꽂혀있대'
흠...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다시 손에 들고있는 맥주병을
물끄러미 보고있다.
'전에는 몰랐는데, 요즘 생각해보니까 맞는 말 같아'
왜?
'그냥..'
그녀는 다시 한참이나 맥주병의 문구를 읽다가 말했다.
'이건 꿈 얘긴데. 어느날 요란한 자명종 소리에 눈을 뜨고
샤워를 하러 가는거야'
속옷은?
그녀는 묘하게 웃으며 얘기를 계속했다.
'샤워를 하고 거울을 손으로 닦는거야. 아무리 닦아도 깨끗해지지
않아. 결국 포기하고 욕실에서 나와서 머리를 말리고, 새로 다림질
한 깨끗한 정장을 입지. 마지막으로 옷매무세를 가다듬고
거울을 보는데 가슴 부분이 점점 붉게 물들어가는거야.'
잉크라도 쏟은거야?
'얘는.. 그럴리가 없잖아'
그녀는 또다시 예의 미소를 지으며 언제나의 버릇처럼
손목을 주무르며 말한다.
음... 꿈은 무의식의 투영이래.
'어떤 얼간이가 그래?'
지그문트 프로이트
'얼간이야'
그럴지도 모르지.
우리는 말없이 서로의 잔을 비워나간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하나 비워진 맥주잔을
소중한듯 한쪽에 진열하고 있었다.
'가끔 생각해. 나는 정말 축복받지 못했다고.
부모님은 언제나 싸우고는 하셨어.
오빠는 언제나 집에 없었고,
동생들은 언제나 울기만했지.
정말 끔찍했어.
이해해? 이런 느낌...
정말 미쳐버릴듯한 기분이 들때는 언제나 학교로 갔어'
다니던 고등학교?
'응. 그게 몇시건, 나는 찾아갔어.
문이 잠겨있으면 담을 넘어서라도 들어갔어.
그리고는 불이 다 꺼진 교실에서 혼자 울곤했어'
무섭지 않았어?
'그렇게 물어보는 애는 니가 처음이다'
어이없다는듯이 웃으며 그녀는 얘기했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보면 머리가 멍해지면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수없게 되버려. 그러면 나는 스스로 다짐을 하는거야.
여긴 지옥이야. 그러니까 이런 고통쯤 당연한거야.
이 교실 구석의 저 여자애도 나처럼 울고있잖아.. 하고'
그 여자애.. 귀신이었을거야.
'그렇게 얘기한 애도 니가 처음이다'
다른 사람한테도 얘기 한 적 있어?
'아니'
그녀와 대화를 하는 동안 나는 나무로 만들어진 테이블을
물끄러미 보고있었다. 나무 무늬는 어쩐지 뭉크의 '절규'와도
같이 보였다.
'나 졸려'
자도 괜찮아. 난 조금 더 마시고 싶어.
'왠지 널 만나는 날이면 꿈을 꾸는것 같아'
너무 좋아서?
그녀는 피식하고 웃으며 서서히 눈을 감았다.
불현듯 내 머릿속에는 아주 어둡고, 무서울만큼 넓은 교실의
영상이 떠올랐다.
나는 책상에 엎드려 엉엉 울고만 있었고,
내 뒷자리에는 여자아이가 한명,
내 옆자리에는 그녀가 앉아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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